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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1 본문

잡학지식/역사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1

잡식블로그 2023. 3. 1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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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6일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주 프리피야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

사고 레벨 7등급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로, 이 사고는 고르바초프가 본격적으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에 나서도록 결심하게 되었던 계기였고, 궁극적으론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 원자력 사고레벨 7등급은 현재까지 2개 밖에 없으며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다.

 

 

사고는 1986년 4월 26일 01시 24분경에 일어났다.

 

https://www.youtube.com/watch?v=yPcWN88he9g 

 

 

일어나게 된 이유

이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휘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 실험조건
    • 정격출력 22~33%인 700~1,000MW
    •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출력은 100%였다.
    • 100%의 출력을 22~33%까지 낮추기 위해 제어봉을 삽입.
이런 실험이 실시된 이유는, 원전의 안전장치구조가 완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설계와 시운전 당시에 완료했어야 하지만, 공산권 특유의 "승리적인 조기달성"을 위해 이를 누락하고 이미 발전소 완공을 선언하여 관련자(아나톨리 댜틀로프 포함)들은 이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 관련자들은 체르노빌 발전소가 이미 상업운전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안전성 테스트를 서둘러 완료할 필요가 있었다.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원자로 냉각장치의 전원공급이 중단될 경우,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돌려 냉각수를 순환시키게 된다. 그런데 대형 디젤엔진 특성상 충분한 출력에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다. 서방 측 원전도 이런 종류의 문제가 많았다. 디젤 발전이 최고출력까지 이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위험은 존재한다. 따라서 원자로가 정지했을 때 과연 냉각 펌프를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지 불확실했고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 실험이 기획됐다. 그리고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전부 실패했고, 댜틀로프에게 바톤이 돌아갔다.

아나톨리 댜틀로프 주재의 실험은 25일 낮 시간대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장치를 정지시키고 저출력 상태로 변경했다. 이 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낮시간대 전력공급유지를 요구했기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지연되어 26일 1시부터 14시까지로 변경되었는데, 그 때까지 계속 저출력 상태로 장시간 안전장치가 꺼진 상태에서 운전했다. 그리고 이것이 후술하는 원자로의 불안정에 일조하게 된다.
 
 
 

문제점

이 때까지는 소련의 기밀주의 및 은폐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운영하는 RBMK 원자로는 구시대 원자력 발전 구조, 그 중에서도 특히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는 노심의 한계로 인해 자기제어성이 낮다는 문제가 있었고, 이것이 후술하는 대폭발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 보통 원자로는 내부에 출력이 높아져 고열이 발생했을 때 자체적으로 출력이 줄어들도록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었고 서방에서 사용하는 비등수형 경수로에서는 물이 냉각재와 감속재의 역할을 모두 하는 만큼 출력이 높아지면 물이 증기로 바뀌어 중성자와의 반응이 낮아져 자연스럽게 핵분열도 줄어드는 반면, RBMK는 물은 냉각재를 담당하고 흑연은 감속재를 담당하는 원리라 출력이 높아져 증기가 발생해도 핵분열이 계속된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이런 원자로 자체의 문제점 외에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건물 내구성 자체도 취약한 편이었는데, 통상의 원전과 달리 격납건물(사고시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건물)이 없다 보니 강철 상자 안에서 돌려야 할 원자로를 나무 상자에서 돌린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런 발전소가 용인된 것은 플루토늄 생산로를 변형시킨 구조라 설계가 단순했고, 저농도 연료로도 고출력 효율을 낼 수 있는 데다가 운전 중 연료 교환이 가능해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많은 에너지 생산이 가능해서였다.

이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자체의 문제점 외에도 실험의 운용 자체도 문제투성이였는데, 비록 일정 요소를 제어 하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임의로 비상 사태에 준하게끔 저출력 상태를 만드는 만큼 전문가들과 원전 설계자 등의 인원들을 대동했어야 했는데 발전소장만 동의한 채 정식 절차도 거치지 않고 현장의 인원들만 동원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현장의 인원들도 만전을 다한 게 아니었는데, 원래는 당시 0시/8시/16시라는 8시간 단위로 발전소를 3교대로 운영하던 새벽조/정오조/저녁조 중 가장 발전소 업무에 숙달한 정오조가 이 실험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상술한 전력공급유지 문제로 새벽조가 이 실험을 담당하게 되었다. 원래 새벽조는 붕괴열 관리라는 비교적 간단한 업무만 숙달하고 있었는데 어떤 연습도 없이 일을 떠맡은 격이었고, 현장에서 그나마 숙달한 인물이라 한다면 책임자인 댜틀로프와 수석 엔지니어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정도였다. 댜틀로프가 이 실험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고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결국 후술하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 원자로의 대폭발은 구식 원자로 자체의 안전성 문제점에 안일한 판단이라는 인재까지 겹친, 총체적 난국이 빚어낸 대참사였던 것이다.

 

 

 

폭발 후 최초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전력 케이블 대다수가 날아가 시설 곳곳이 마비되는 통제불능의 아비규환이 된 와중에도, 아나톨리 댜틀로프와 선임 연구원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는 발 빠르게 대처에 나섰다. 문제는 이들이 이 폭발을 "수소 폭발로 인한 것이지 원자로 자체는 아직 멀쩡하다"고 판단하고 발전소 소장과 부소장에게도 그렇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원자로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한시바삐 화재를 진압하고 수동으로 노심에 제어봉을 삽입하고 냉각수를 공급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대처가 정해졌는데, 이미 4호 원자로 자체가 폭발해 붕괴되고 노심의 잔해가 주변을 나뒹굴어 사방으로 치명적인 방사선이 유출되고 있을 때,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원자로에 대한 급수 투입을 위해 인력을 투입시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들을 죽으라고 내보내는 짓이었다. 이 치명적인 오판으로, 아직 멀쩡했던 직원들 다수가 당하지 않아도 됐을 피폭을 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후술하는 소방관들의 피폭도 이 오판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나마 댜틀로프가 3호기 원자로 제어실로 뛰어들어가 정지를 요청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이러한 지휘자들의 판단 미스를 비롯한 미흡한 초동 조치는 그 때까지 이런 재난에 대비한 메뉴얼 자체가 전무하다는 것도 크게 한 몫했는데, 여태껏 체르노빌 원전의 운영 인력들 또한 RBMK가 터질 거라는 상황 자체를 전혀 상정하지 못한 채 그저 AZ-5 버튼만 누르면 비상 정지가 가능할 거란 정도의 대비밖에 없었고 원자력 사고 7레벨 자체가 그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알려진 원자력 사고라 해봐야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레벨 5 정도였고, 레벨 6의 키시팀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소련 특유의 기밀주의로 냉전 종식 후에야 알려졌을 정도다. 물론 스리마일-키시팀의 두 원자력 사고는 체르노빌과 상황도 스케일도 격이 달라 알려져봤자 딱히 참고는 안 됐겠지만, 그런 마당에 난데없이 전대미문의 레벨 7의 사고가 터져버렸으니 상황의 인지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방사능 누출을 측정할 때 3.6 뢴트겐이 한계인 소형 계측기로 측정해서 3.6 뢴트겐이 나오자 그대로 믿었다가 더 고성능의 계측기로 측정하니 수치가 15,000 뢴트겐 이상의 끔찍한 수준으로 드러나자 경악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치냐면 발전소 측이 사태초기에 측정하고 보고한 3.6 뢴트겐의 4,000배가 넘는 전대미문의 수치였다.

 

 

https://youtu.be/59pSFs0DCCs

 

신고를 받고 1차로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었고, 그 다음으로 급히 달려온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소방 준장이 지휘하는 체르노빌 소방대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력을 다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방사능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쳤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재난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진화 작업에 전력을 다했고, 그 결과 오전 5시에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다. 이들 소방관은 화재진압 이후에도 남아 현장 정리작업까지 했으며, 많은 수가 엄청난 방사선에 노출되어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텔랴트니코프의 소방대는 역부족이었으나 화재 진압과 3호기의 보호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3호기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만약 이것까지 터졌다면 재앙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이 공적을 인정받아 텔랴트니코프는 그의 부하인 블라디미르 프라비크, 빅토르 키베노크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사고 직후 방사선에 피폭됐던 직원들과 1차로 파견된 소방대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쓰러져갔고, 결국 화재가 진압됐을 무렵 실험을 진행했던 새벽조 직원들 중 제 발로 서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화재 진압에서 사용된 대량의 물이 4호기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했는데, 이 증기가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을 만들어냈고 26일 21시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켜 높이 50m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원자로는 아직 무사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벗어나는 사태의 심각성이 계속 드러났고, 결국 체르노빌 사태 진압의 지휘권은 소련 본국으로 넘어갔다.

내부에서 열을 방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불길이 아니라 분열을 계속하고 있는 핵연료라는 걸 깨달은 소련 당국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대량의 붕소,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을 뿌리면서 화재를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원자로 상공의 방사선이 너무 강해서 원자로 위에 헬리콥터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고, 원자로 상공을 지나가면서 흙을 뿌리도록 해야 했다. 이 와중에 Mi-8 한 기가 노심 상공으로 날아가다 엄청난 양의 방사능을 그대로 직격당함과 동시에 크레인 케이블에 로터가 걸려 날개가 분리되며 추락했으며, 탑승 인원이 전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지역 방송사에서 생방송으로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이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전국으로 송출되고 말았다.

 

사고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uNtgYtF4FI 



이 위험천만하고 희생자들까지 나왔던 방법은 다른 추가대안이 나오기 전인 5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나, 흙이 4호기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뿌려지면서 열이 식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실패했고, 헬리콥터도 추가 폭발 위험 때문에 물러나야만 했다.

그나마 4호기와 매우 가까이 붙어있던 3호기의 상태가 무사하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4호기에 주입하면서 최종적으로 5월 9일, 원자로 화재 진압에 성공했다. 만약에 3호기마저 폭발했다면 더욱 참담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사고 직후 구 소련 정부는 필사적으로 이를 숨기려고 했으나 사고로 인해 발생된 낙진이 스웨덴까지 날아가, 스웨덴의 언론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소련 근방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 낙진이 감지됐다."고 밝히자 어쩔 수 없이 소련 당국은 직접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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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2

전편 링크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1 1986년 4월 26일에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주 프리피야트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 사고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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