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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2

잡식블로그 2023. 3. 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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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링크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1

1986년 4월 26일에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주 프리피야트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 사고 레벨 7등급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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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대피, 그리고 준비
2. 피해
2 - 1. 인명피해
2 - 2. 주변 지역 피해
2 - 3. 주변 나라 피해
3. 사고 이후

 

1. 대피 그리고 준비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한 도시인 프리피야트에는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그들의 가족 등을 포함 5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특히 100 km 내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가 있었기에 사태는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에서는 사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피폭당했다. 이 시기 체르노빌은 보통 북풍이 불지만, 사고 당시에는 남풍이 불었기에 체르노빌 남쪽의 키예프는 상대적으로 무사했지만 체르노빌 북쪽의 벨라루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사고 발생 당일 그 방사성 물질이 북쪽 멀리 스웨덴까지 날아갔으나 항의를 묵살하는 바람에, 이 소문이 전 유럽에 모조리 퍼지고 나서야 사고 소련은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낙진은 전 유럽을 싸그리 다 덮었고, 편서풍을 타고 멀리 떨어진 일본  홍콩에도 이 사고의 낙진이 떨어졌다. 그보다 가까이 있는 중국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북미/남미/아프리카 같은 지구 반대편이나 남반구를 빼고는 모조리 낙진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사고 첫날의 방사선 누출량은 그렇게 크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는 사고 초기에 사용된 소형 측정기의 계측값 때문이었다. 측정 가능한 최대값이 굉장히 낮았고, 현장에서 측정된 최대값(약 3.6 뢴트겐)을 기반으로 보고되었다. 프리피야트에 파견되어 방사선량을 측정하던 군인들의 책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상승하는 방사선량에 경악했고, 높으신 분들 역시 이 보고를 받고 경악했다. 이후 레가소프의 지적대로 대형 측정기를 가져와 측정한 결과 막대한 수치가 나온 것(약 15,000 뢴트겐). 그리고 26일 밤에 원자로에서 다시금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가뜩이나 많이 누출된 상태였던 방사성 물질의 누출량이 더욱더 크게 늘었고, 이에 따라 소련 당국도 주민들을 피난시키기로 결정했다.

사태가 워낙 심각했던 까닭에 군부대와 경찰, 소방관 등 수십만의 인력이 인근으로 투입되어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처음에는 프리피야트와 체르노빌, 그 인근 지역 주민들만 피난시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험지역은 점차 확대되었기에 4월 30일부터 추가적인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발전소 주변 30 km 이내의 주민 전부가 철수했으며, 방사성 물질이 대량으로 뿌려진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이 종료된 것은 8월이었다.

당시 아주 번창하던 도시인 프리피야트는 이 사고로 인해 인구 5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도시를 하루 아침에 전부 떠나야 했다. 현재 가장 유명한 유령 도시로 알려져 있는 지금은 온갖 잡초가 자라고,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소련 당국은 제염 작업을 위해 전국의 방사선 방호복을 긁어모았지만, 방사선 방호복은 비싼 데다 만들기도 어려워 인력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해 일부 복구 인력만 입을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던 소련 당국은 어쩔 수 없이 화생방 보호의나 우의에 납을 기워만든 임시 방호복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추가로 소련 당국은 아이오딘 131에 대한 방호를 위해 인부들에게 아이오딘이 첨가된 보드카를 다량 지급했다. 이러한 조치는 갑상선 부위에 아이오딘을 과포화시켜 갑상선이 방사성 아이오딘에 오염되는 것을 막아 주기에 분명히 효과가 있었지만, 아이오딘 외의 다른 방사성 물질은 막을 수가 없었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수습을 위해 골머리를 짜내다가 토의 끝에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지역은 모조리 부숴서 평평하게 한 다음 콘크리트로 2m 이상 덮어버리고, 오염된 원자로는 초대형 커버를 씌워버린 뒤에 10년쯤 지나면 해결 방법이 나오겠지?"였다. 즉, 지금 기술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일단 뚜껑을 덮어서 봉인해 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우 5년 8개월만에 소련이 해체되어 버리면서 다른 나라로 쪼개져버렸고 이 계획은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파기되었다. 뭐 그래봤자 소련이 여전히 건재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 발생 후 3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폐연료를 처리할 기술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2. 피해

2 - 1. 인명 피해

  •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아키모프
    선임연구원으로, 동료인 레오니트 톱투노프와 함께 실험을 진행하던 중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원자로 비상정지 버튼(АЗ-5)를 작동시켰으나 당시 이들이 알지 못했던 제어봉 설계의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원자로가 과부하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사고 직후 14명의 소방관들을 지휘하여 화재 진압을 시도했으며 이후 톱투노프와 함께 원자로 근처의 냉각수 밸브가 있는 곳으로 가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을 뒤집어쓰며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밸브를 작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원자로는 이미 파괴되었으며 원자로로 통하는 냉각수 배관은 대부분 충격으로 파괴된 뒤였기에 냉각수 밸브를 작동시켜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고, 결국 톱투노프와 함께 추가적으로 피폭되며 쓰러진 채 소방관들에게 발견되었다. 이후 아키모프는 톱투노프와 함께 병원에 실려간 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범인으로 손가락질당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키모프는 15시버트 이상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기에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인해 사망했다. 쌍둥이 동생으로부터 골수 이식을 받았으나 지나친 피폭 탓에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임종 이전 말을 할 수 있을 때 “난 모든 걸 올바르게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라고 반복해서 했다고 한다. 사후 용기 칭호가 수여되었다.
  •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
    순환펌프 기사. 이 사고의 첫 번째 사망자이다. 사고 당시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시에 의해 메인 순환펌프 엔진실의 맨 끝에서 순환펌프를 작동하고 있다가 펌프가 심하게 흔들리며 증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상황을 목격했고, 아키모프에게 보고하려고 하려는 순간 원자로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폭발에 직접적으로 휘말린데다 곧바로 붕괴된 발전소 외벽 잔해에 매몰되었다. 호뎀추크는 폭발로 인해 즉사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폭발한 원자로와 너무 가까운데다가 메인 순환펌프실은 완전히 무너져 매몰된 상태이기에 현재도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시신을 찾지 못한 탓에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무덤은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원자로 3호기와 4호기 사이의 공간에는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위령비가 만들어져 있고, 매년 유족들이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한다.
  • 발레리 페레보스첸코
    사고 후 댜틀로프의 지시로 알렉산드르 쿠드럅체프, 빅토르 프로스쿠랴코프와 함께 원자로에 제어봉을 수동 삽입하기 위해 원자로 홀에 진입했다가 폭발한 원자로를 확인함과 동시에 피폭되었다. 이후 그는 친구인 호뎀추크를 비롯한 동료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6주 후에 숨졌다.
  • 이반 오를로프
    원자로 제어를 시도하다 피폭되어 사망.
  • 바실리 이바노비치 이그나텐코
    사고 직후 투입된 14명의 소방관 중 한 사람. 계급은 중사. 발전소 지붕과 원자로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노출된 원자로의 노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14시버트 이상의 치명적인 방사선에 피폭된 그는 곧 매우 심각한 급성 방사선 증후군(ARS)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프리피야트 병원에 잠시 머무르다 모스크바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2주뒤인 1986년 5월 14일에 ARS 합병증으로 숨졌다.
    링크에 따르면, 피폭 후 입원한 이그나텐코를 만나기 위해 당시 임신 중이어서 문병이 불가능했던 아내 루드밀라 이그나텐코는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 둘이 있어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여 허가받아 입실하였고, 남편이 죽는 그 날까지 병실에 함께 있었다. 이때 "남편과의 신체적 접촉(키스나 포옹 등)을 금하라"는 지시를 무시하여 루드밀라도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태중의 딸 나타샤는 더욱 더 영향을 크게 받아 선천성 심장기형과 간경변으로 인해 태어난 후 5일 만에 사망했다.# 루드밀라 역시 피폭에 무사할 수는 없어서, 2년 뒤 급성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겨우 목숨을 구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의하면 움직이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한움큼씩 빠지고, 피부는 갈수록 벗겨지고, 입안에서 간 조직과 폐의 조각을 계속 토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됐느냐면, 고선량의 방사능 피폭을 당한 뒤 염색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신체가 정상적인 세포분열을 통한 회복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 채로 온 몸의 조직이 괴사되어 가는 것.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 수 있다. 2019년 12월에 BBC에서 아직 생존중인 루드밀라와 이에 대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생전의 바실리 이그나텐코는 상당히 체구가 크고 몸이 건장했다고 한다. 류드밀라와의 결혼 사진이나 형제들과 찍은 사진을 보더라도 한눈에 봐도 체구가 크고 탄탄하다는걸 알수 있다. 하지만 고선량의 방사능 피폭 앞에선 이 건장한 체구의 청년도 별수 없었다.
  • 블라디미르 샤셰노프
    자동 시스템 엔지니어로 사고 당시 604호실에 있었다고 한다. 604호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폭발에 의해 고온의 냉각수와 증기를 뒤집어썼으며, 쓰러진 기둥에 깔려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졌다. 바닥에 고인 물에 몸이 반쯤 잠기고 입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는 상태로 동료들에게 발견된 그는 프리피야트 병원에 후송되어 즉시 치료를 받았으나, 척수파열, 전신화상 및 내장 부상으로 인해 사고 당일인 1986년 4월 26일 5시 또는 6시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목격자들에 의하면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거기, 발레리가..."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고 하며 의사에 의하면 병원에서 그는 의식을 회복한 후 "나한테서 떨어져! 난 원자로에서 왔다고!"라고 말했다고 한다.(아마 자신 근처에 있으면 당신들 역시 피폭될 것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는 4월 29일 체르노빌 근처 치스토갈로프카(Чистогалівка)마을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가 1년 후 꺼내져서 동료 29명과 함께 모스크바의 공동묘지에 재매장되었다. 발레리 호뎀추크와 함께 폭발로 인한 초기 사망자 중 한 명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올레크 겐리흐처럼 폭발로 수증기를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 다만 올레크 겐리흐는 예외적인 경우고, 부상에 의해 2명, 방사선 피폭에 의해 2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투입된 인원 중에 이 중 2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쪽은 정말 방사선 때문에 사망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아서 비공식 집계로 남아있다.

당시 피폭 인원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피해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애매한 저수준으로 피폭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련 정부는 제한된 사람들(주로 공산당원 위주)만 치료해주며 아전인수격으로 데이터를 해석했다. 냉전 시기의 소련은 사고 피해를 줄이고 자료를 숨기기만 했다. 그러니 서구권에서는 소련에서 내주는 자료만 가지고 사고 경위나 피해를 말 그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의도적으로 축소한 자료를 다시 의도적으로 부풀려서 장님 코끼리 더듬듯 실제 피폭자를 추정하다보니 결과물의 정확도가 엉망이 된 것. (예를 들면 자연사한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마저 피폭으로 죽었다고 카운트)

이 대형사고로 인해 지금까지도 이 발전소 주변 지역이 몽땅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여 있다. 스리마일에 이은 체르노빌 사고로 원자력 발전소는 대표적인 기피시설물이 되었다.

또한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사고 당시 프리피야트는 물론 키예프도 정상치보다 수천 배는 더 높은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나 당국은 다가오는 5월 축제(5월 1일 국제노동절, 5월 9일 대조국전쟁 전승절)를 준비하기 위해 이 사실을 숨겼다.

체르노빌 사고로 현장지휘를 맡았던 발레리 레가소프 역시 높으신 분들에 의한 강압과 정치적인 힘에 눌려 UN 사고청문회에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소련 정부에서 날조한 거짓 결과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후 전세계 인류와 사고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이후 자살한다. 이때 원자력 사고 수습 과정에서 레가소프도 피폭의 영향으로 해가 갈수록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과 과학자로서의 양심, 죄책감에 죽기 직전에 모든 걸 폭로하는 음성과 자료를 낱낱이 공개하고 바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각 단체마다 사망 입증과 집계 방식, 그리고 기준이 천차만별이라 정확한 피해 수치의 통계는 알 수 없다. 본 문서의 서술에서는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른 83만명의 근로자를 피폭자 기준으로 한다. 83만명이 아닌 다른 기준을 쓰기도 한다. 연간 평균적으로 130~17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계속해서 피폭되었던, 작업 초기인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 누출 방지와 누출 방사능 처리 작업에 투입된 해체작업자들 22만 6천 명을 기준으로 보기도 한다.(EXPOSURES AND EFFECTS OF THE CHERNOBYL ACCIDENT, 526쪽)

그래도 추적조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어서 2012년 11월 8일, 미국에서 사고 현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에 대한 추적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자세한 건 관련 소식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이러한 조사는 2021년에도 다시 진행되었는데 미국 국립암 연구소 예이거 박사팀은 체르노빌 사고 청소에 동원되어 방사능에 노출된 105명과 그들의 자녀 130명을 조사한 결과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자식도 방사선에 의한 유전자 변이는 확인되지 않았다.(Lack of transgennerational effects of ionizing radiation exposure from the Chernobyl accident, Science 2021. 5. 14.)

다행인 건 지하 콘크리트층이 뚫리는 수준의 멜트스루는 피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까지 갔더라면 지하수가 오염되어 희생자 수는 수십 곱절이나 늘었을 것이다.

한편 위에 언급한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바실리 이그나텐코 등 피폭 희생자들은 죽은 뒤에도 그리 편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하게 피폭된 관계로 그들의 시신 역시 심각한 수준의 '방사성 폐기물'이 되었기 때문에 납으로 된 관에 안장한 뒤 용접하고 콘크리트로 구덩이를 채우는 형태로 매장해야 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10만 건 이상에 달하는 낙태 수술이 행해졌다.

 

 

 

2 - 2주변지역의 피해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다. 이때 수많은 땅에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는데, 향후 바람을 타고 번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아예 트랙터를 사용하여 땅을 갈아엎고 밑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흙을 퍼올려 덮어버렸다. 주변의 숲들도 똑같은 이유로 갈아엎으려고 했으나 시간과 인력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그냥 출입금지구역으로만 지정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가 되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관람도 여기서 출발.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꽤나 적은 숫자로,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빈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까운 상태다.

 

 

2 - 3 주변 나라의 피해

 

주변 나라들도 무지하게 피해를 봤다.

일단 벨라루스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하필이면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있었던 탓에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이 떨어져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33%씩이나 되는 곳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금지 구역이다.

2019년 기준으로 국토의 22%는 오염지역으로 남아있으며 벨라루스의 국토개발 계획에 심각한 장애로 남아있다. 이 빈땅을 루카셴코 정부는 낙농업 중점지역으로 만들 계획을 추진했지만 낙후된 벨라루스의 경제사정 탓인지 관련 연구자들은 벨라루스가 국민들을 방사능 발암물질로부터 국민들을 지키는데 실패했다고 성토하고 있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반대쪽에서도 토양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다. 특히 영국의 일부 지역은 이때의 사고로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탈리아산 파스타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일본에서 수입이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 역시 이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 20~30대 중에 갑상선암 발병 비율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방사능량이 미미했으며, 갑상선암의 발생율 증가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건강에 대한 관심과 검진율의 증가가 원인이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아주 영향이 없던것은 아니었고 이 당시에 방사능에 대한 규제조치가 약했기 때문에 남양유업 한국야쿠르트를 비롯한 여러 식료품 회사에서 방사능 과다검출로 폐기처분될 뻔한 유럽 여러 나라들의 폐기 농산물, 유제품을 수입해서 분유, 커피프림, 라면, 사료 등으로 가공해서 팔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1980년대 말에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우지 파동이나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처럼 공론화되지는 못하고 흐지부지 넘겼다.

이 사건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야생동물의 뼈와 뿔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됐다. 독일 같은 경우 방사능에 오염된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을 경우 정부에서 돈을 주고 회수할 정도였는데, 특히 사슴의 경우 한약재로 인기가 높은 녹용에 방사능이 쌓이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도 체르노빌 사고가 너무도 큰 피해였기 때문에 자국 내 원전 반대여론과 집단 패닉 사태를 우려하여 사건에 대한 진상을 감추었다. 체르노빌 사건 관련 자료는 당시 즉각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혔으며, 2000년대 들어서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사고 이후

 

https://youtu.be/vkUI_UpKwag

 

 

https://youtu.be/slZvAk74Ww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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